카프카의 <변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는 인간

“어느 날 아침 그레고리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문장이다. <변신>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그레고리는 5년 전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 가족의 생게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빚까지 떠맡고 있는 집안의 장남이다. 거의 하루도 쉴새없이 일하고 가족을 위해 고생을 하지만 불만은 거의 없고 오히려 음악적 재능이 있는 동생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원하고자 하는 든든한 아들이자 자상한 오빠였다. 하지만 하룻 밤만에 벌레로 변해버린 그는 가족들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고 방 안에 가두어진 채 지내게 된다.

방밖으로 나오려고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거절과 소외, 그리고 잊혀짐 뿐이었다. 그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던 여동생마저도 자신은 이렇게 지낼 수 는 없으며, 자신은 앞으로 이 괴물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아버지는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예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 있지요.” 결국 주인공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입은 상처로 인해 쓸쓸히 홀로 방안에서 죽어가게 된다.

재작년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잠시 멈춰 늘 가까이 있지만 느끼지 못했던 죽음과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죽어가는 과정과 남겨진 책임에 대한 무게감은 컸다. 특히 만약 잘못 되어 평생을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어 살아가게 하면 어떻게 되나라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그레고리에게 일어난 변신이 내게도 언제든 찾아있을 수 있는 셈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가정은 "존재가 드러나 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란 존재의 '무엇됨'(그의 능력, 지위, 재산 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인정받고 사랑받는 곳이라는 의미다. 부모는 아기를 사랑한다. 아기를 부모가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똑똑하거나 능력이 뛰어나거나 미모 때문이 아니다. 아기의 ‘무엇됨’이 아니라, 아기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부모가 외출하려고 할 때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부모의 부재가 슬픈 것이지, 부모의 사회적 지위, 수입 등의 그들의 ‘무엇됨’ 때문이 아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오늘날 우리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무엇됨'에서 존재 이유와 가치를 찾으려는 한다는 점이다. 능력과 재산, 사회적 지위, 학력. 미모 등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관계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됨'은 영속적이지 않고,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고 깊은 소외와 단절, 불안과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존재가 아닌 존재의 무엇됨에만 관심갖는 현대사회의 비극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후 숨게 된다. 이 때 자신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물에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날의 아담처럼 오늘 우리도 능력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학력, 미모 등 존재의 '무엇됨'에 의지하여 자신과 서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판단하고 관계 맺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부모가 아기를 사랑하듯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리고 우리도 자신과 서로를 존재자체만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 때,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면 길이 어떻지라는 걱정이 앞섰는데, 오랜만에 내려인지 몰라도 눈 자체를 즐기게 된다. 존재의 무엇됨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길 소망해 보는 시간이다.